책 이야기/기독교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신학과 인문학의 대화) (김용규 / IVP)

SMK_JOO 2020. 4. 5. 20:33

나의 경험과 교육이 묻어나는 곳에서 결국 성경에 대한 해석도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것. 나의 경험, 지식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성경을 읽고 깨달아 아는 것. 신학 또한 인문학의 영향을 받아 변화되었다.

나의 생각을 성경적 사고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동성애, 페미니즘, 생태학 등 여러 사회문제를 인문학의 시점에서 바라보지만 그 해답은 신학에서 찾는다. 아니 모든 해답은 결국 하나님 안에 있다. 


신학과 인문학은 그 지향하는 바와 방법론이 서로 다릅니다. 거칠게 표현해 신학이 신 중심적 사유 체계라면 인문학은 인간 중심적 사고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지만, 큰틀에서 보면 인문학은 기독교 신학에 부단히 새로운 피를 공급해 왔습니다.

 

정통신학과 플라톤주의

 

  기독교 신학은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북부 아프리카에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가 만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기독교가 외적으로는 다른 종교와의 구분을 위해, 그리고 내적으로는 내부의 이단자들과의 구별을 위해 시급히 교리를 구성하고 사상을 체계화해야 할 때였지요. 

  그리스인들이 이성을 통해 세계와 삶을 사변적으로 파악해 나갈 때, 히브리인들은 신앙을 통해 그것들을 종교적으로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이 이성을 통해 얻은 탐스러운 열매인 데 비해, 말씀은 계시로 주어진 고귀한 선물이었지요.

  플라톤주의의 도움을 받아 정리된 삼위일체론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정리한 기독교 교리와 사상 중 그 어떤 것도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나온 것은 없지만, 그중 어느 것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서 정리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신 중심적 사유와 인간 중심적 사고, 신앙과 이성,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이 두 이질적 요소가 기독교 신학이라는 하나의 체계 안에 함께 있다 보니, 그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성육신 문제가 그중 대표적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시대마다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는 인문학을 배척하기보다 끌어안아 거기서 생기는 부작용은 부단히 극복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하며 성장해 왔다는 거지요. 기독교 신학은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할 뿐 아니라 수시로 변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교훈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세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중세에는 정통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새로이 첨가됨으로써 기독교 신학에서 철학의 비중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성의 역할이 더 강조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자면 자연의 사다리와 존재유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한 개념을 통해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와는 다른 또 하나의 구원의 방법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피조물인 자연에도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을 통해 그것을 파악함으로써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 점차 하나님께 다가가 마침내는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지요.(존재유비 : 피조물의 사다리를 통한 정신의 신을 향한 상승)

 

종교개혁 신학과 인문주의

 

  근세는 신앙에 대한 이성의 반란과 전복이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인문주의(humanism)는 넓은 의미에서 ‘인간을 존중하는 윤리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휴머니즘, 즉 우리가 지금 ‘인문주의’라 부르는 것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에 프랑스, 독일, 영국으로 퍼져 나간 특정한 문예사조이자 운동을 가리킵니다. 인문주의는 중세의 신 중심적 사상과 문화에서 탈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고대 정신을 재발견하여 인간 중심적 문화와 사상을 건립하고자 하는 지적 운동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과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점은 부패한 가톨릭교회와 교황청에 저항한다는 것과 그 이론적 대안이자 돌파구로 고전을 연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5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을 때, 그것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바꿔 말해 그리스 로마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하나로 융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16세기 인문주의자들과 기독교 인문주의자들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 해도, 인간 중심적 사상인 인문주의와 신 중심적 사유인 기독교 신학이 끝까지 함께 갈 수는 없었습니다. 죄, 구원, 은총과 같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 주제에 대한 이견 때문에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인간의 본성과 그 활동에 대해 긍정적이고 낙관적 입장을 취하는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근원적 죄성을 부각시키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 반면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이뤄진다고 믿는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인문주의자들의 입장에 찬성할 수 없었지요.

 

자유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칸트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인문주의가 그렇듯이 어느 특정한 철학 사상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출현,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등장, 사회적으로는 산업혁명으로 힘을 얻은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인간을 ‘개인’으로 규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인격을 중시하는 다양한 사회사상 및 운동이지요.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이 출간되면서 시작하여 리츨, 헤르만, 하르낙 등을 거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서구 기독교 신학의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자율적 인격에서 나오는 다양한 실천 영역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융합하고자 노력했지요. 자유주의 신학은 단일한 사상이라기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주로 독일의 신학자들이 주장한 이론이 근간이 되어 세계적으로 확산된 다양한 기독교 사상과 문화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학자에 따라서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크지만, 그 주된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우선 계시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주관적, 역사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또 성서에 기록된 기적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적 과학 지식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부성애와 인간의 형제애를 강조하고, 전쟁의 포기와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등 그 특성이 다양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결정적 문제점은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과 전통적 신앙고백이나 신조가 아리나 인간 이성과 개인 감정, 그리고 문화적이고 정황적인 해석에 둠으로써, 결국 기독교 신학을 인본주의적, 개인주의적으로 탈바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자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우선, 자유주의 신학의 인본주의적 성격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스스로의 한계와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 낙관적 세계관, 역사적 진보에 대한 환상이 무참하게 깨졌기 때문이지요. 이에 반발하여 칼 바르트, 에밀 브르너, 루돌프 불트만, 파울 틸리히 등으로 이어지는 신정통주의와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이 등장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내재된 개인주의적 성격은 기독교 신학이 개인의 사적 구원에 집중함으로써, 예수님이 사랑했던 이 땅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에 대해 무관심한 부르주아 신학으로 전락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이에 대한 반발로 서구와 남미 대륙 등에서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등 이른바 급진 신학이 등장했습니다. 

 

포스트모던 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근대적 이성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구성적 포스트모던 신학은 인간중심주의, 개인주의, 가부장주의, 경제우선주의, 소비주의, 민족주의 등을 낳은 근대적 이성을 재구성하기 위해 생태학, 페미니즘, 평화와 같은 해방 모티브를 지닌 운동들을 지지합니다. 

 

기독교 신학의 본질과 사명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와 우리 세계를 연결하는 든든한 다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학문을. 이어 주는 건실한 교량이지요. 

  칼빈은 자주 성서의 말씀을 당시 시대적 상황에 맞춰 교훈하곤 했습니다.

로마서 5장 2절 주석

  “현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고, 미래에 대한 지속적이고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누가 감히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도 남겼지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호모 데우스의 시대(유발 하라리)입니다. 호모 데우스 시대란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과학을 통해 슈퍼 휴먼이 된 극소수의 부자들이-마치 올림푸스 산정에서 사는 그리스 신들처럼-‘불멸’, ‘행복’, ‘신성’을 누리며 사는 시대를 말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70억 사람들 모두가 그런 초인간들이 만든 커뮤터 알고리즘을 통해 조종당하며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계급, 곧 호모 유스리스로. 사는 시대지요.

  그러니 이 시대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첨단 과학의 시대이자, 역사상 유래가 없는 불평등의 시대이고, 또한.   역사상 유래가 없는 절망의 시대가 되겠지요. 

 

신의 죽음과 그 이후의 풍경들 

 

  니체의 ‘신은 죽었다’의 의미는 신중심의 사회에서 15-16세기의 르네상스, 16세기의 과학혁명, 17세기의. 계몽주의, 18세기의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19세기에는 실증주의와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그동안 신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해왔던 신본주의 가치들에서 차츰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성, 합리성, 객관성, 과학, 계몽, 실증, 자유, 평등, 박애, 진보, 민중 해방, 혁명과 같은 인본주의 가치들을 지향하며 신처럼 숭배하기 시작했지요. 따라서 신은 죽었다는 말은 ’인간이 신이 되었다’라는 놀라운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신으로 등극한 근대 이후, 자연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인간의 삶은 갈수록 무의미해졌으며, 사회는 무한 경쟁의 지옥으로 변했다는 것은 이제 어린 아이까지도 아는 사실입니다.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깨달은 것은 신의 죽음이 곧바로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신본주의 가치의 몰락은 동시에 인본주의 가치의 몰락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위험사회와 유동하는 공포

 

  벡이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경고한 대로, 세계는 이제 예측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자연적, 사회적. 재난들이 삽시간에 국민국가적 차원에서는 극복될 수 없게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글로벌 위험사회’로 변했습니다.

  공포는 어두운 거리에도 있고, 반대로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안에도 있습니다. 침실에도 있고, 부엌에도 있지요. 우리의 일터에도 공포가 기다리고, 그곳을 오가기 위한 지하철에도 공포가 도사립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도, 우리가 소화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에도. 공포가 숨어 있습니다(바우만).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갈 길을 잃은 겁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은 관능과 쾌락만을 탐닉하는 향락주의, 소유와 소비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 누구에게나 안락한 도피처를 제공하는 각종 상대주의, 모든 것을 시큰둥하게 만드는 냉소주의, 아니면 오히려 정반대로 정치, 연예, 스포츠, 레저, 종교 등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열광주의, 이들 가운데 각자의 처지나 취향에 따라 하나둘씩 골라잡고, 이것저것 번갈아 가며 하루하루를 자위하며, 적어도 겉으로는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가야 할 곳이 없는 사람은 어떤 길로 가도 좋으니까요!

 

실리콘밸리가 만든 신흥종교

 

  새로 생겨난 신흥종교 데이터교. 이 종교에서는 컴퓨터 알고리즘이 ‘신’이고 데이터가 ‘말씀’입니다. 예전에 자신의 진로가 결혼 상대를 결정하는 것 같은 중요한 문제는 기도 중에 하나님엥게 묻거나,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물었지요.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라리는 앞으로 사람들이 아마존이나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차츰 새로운 우상으로 등극한 컴퓨터 알고리즘과 데이터의 노예로 전락할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말씀과 데이터 가운데 무엇을 더 믿는지를 한 번쯤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불가능성

 

전근대 : 신중심시대 / 신본주의 가치 /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행복, 위대함…

근세, 근대 : 인간중심시대 / 인본주의 가치 / 자유, 평등, 박애, 이성, 과학, 계몽, 진보, 혁명…

탈근대 : 개인중심시대 / 탈근대적 가치 / 다양성, 상대성, 타자성, 일상성, 현재성…

호모 데우스 시대 : 데이터중심시대 / 가치 소멸? / 인류 종말?

 

  20세기에 벌어진 제노사이드 가운데 백만명이 넘는 규모 만도 열 건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정당화할 때 일어나는 끔찍한 일입니다.

(제노사이드 : 그들이 잘못을 했든 아니든 간에, 단지 그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들을 무조건. 살해하는 대량 집단학살)

 

작은 이야기가 낳은 폭력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스스로를 진리로 정당화하며 우리를 송두리째 사로잡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양성, 개별성, 상대성, 타자성, 현재성을 지향하며, 개인의 심리와 성적 취향, 다양한 문화와 요리, 놀이, 주거, 관광, 레저와 같은 작은 이야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작은 이야기가 없는 큰 이야기는 폭력이다. 그러나 큰 이야기가 없는 작은 이야기 역시 폭력이다.

 

부러진 모세의 지팡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인류 문명의 기반이었던 큰 이야기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동력인 주체를 면밀하게 해체하며, 타자와 차이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공동체의 결합과 연대를 현저하게 약화시켰습니다.

 

공허와 맹목 사이로 난 길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모두 함께 함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위대함과 같은 전근대적, 신본주의 가치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성, 계몽, 혁명, 과학, 진보, 해방과 같은 근대적,인본주의 가치들, 그리고 상대성, 다양성, 개별성, 현재성 가은 탈근대적, 개인적 가치들까지 우리가 시대를 따라 추구했던 가치들을 모두 되살려 냄으로써 ‘온전한 가치’가 되게 하자는 겁니다. 

  이일은 쉬운 일이 아니고 그것에 도달하는 길도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이자 혁명의 종 교인 것이지요. 

 

너희도 온전하라

 

  통합과 융합을 위해서는 원칙과 실용, 이론과 실천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 필요합니다. 그 간격 속에서 연약한 인간들이 숨을 쉬고,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며, 거대한 통합과 융합이 준비되고 숙성하는 겁니다. 

  온전한 사랑 : 하나님 사랑 + 자기 사랑 + 이웃 사랑 + 물질 사랑

  온전한 사랑 안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우 사랑이, 악한 우리로서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잡아 줍니다. 또한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죄된 우리로서는 채우려야 채울 수 없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해 줍니다.

 

온전한 가치, 온전한 신학을 위하여

 

기독교 신학이 시대마다 새로운 변화와 도전으로 다가오는 시대의 인문학을 끌어안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부단히 온전함을 지향해야 함을 의미기하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