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는 예배(티시 해리슨 워런 / IVP) 06 남편과의 다툼 : 평화의 인사 건네기, 평화를 이루는 일상의 일
06 남편과의 다툼 : 평화의 인사 건네기, 평화를 이루는 일상의 일
나의 민낯은 가족들에게서 보게 된다. 부모님을 대하는 나의 모습, 피곤한 날 아내와 아이를 대하는 나의 모습 속에서 거친 나를 본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나의 예민함의 피해자가 된다. 날마다 나를 죽이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참 힘들어 보인다. 나의 힘으로 안 되는 평화이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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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두려움, 불안, 정체성, 소망을 두고 논쟁한다. 오늘의 다툼이 결혼 생활의 위기는 아니다. 이 다툼은 우리의 방관하에 계속 쌓여온 일종의 습관적 분노 때문에 생긴 엉덩이 밑 가시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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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갈등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싸움을 해야하는 시험은 대부분집에서, 남편과 아이들과의 사이에서, 내가 피곤하거나 두려움을 느끼거나 낙심하거나 컨디션이 별로 이거나 혹은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때 일어난다. 나는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는 평화주의자다.
샬롬은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단어로, 모든 것을 강렬하게 사로 잡고 모든 것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평화를 의미한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선배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후배 악마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계를 망가뜨릴 수 있는지 지도한다.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등한시한채 가장 어렵고 영적인 의무에만 마음 쓰게 하거라. 명백한 것을 무서워하며 소홀히 여기는 인간의 특성은 정말 쓸모가 있지. 그걸 더 강화시키거라." 그는 이어서 말한다. "내가 맡은 환자 중에는 아내나 아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열렬한 기도를 쏟아놓다가도, 진짜 아내나 아들에게는 기도하던 그 자리에서 곧바로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않는, 무척 길이 잘 든 인간들이 있었다."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선교를 추구하는 일은 내가있는 곳, 나의 집, 나의 동네, 나의 교회에서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나는 조금씩 깨닫고 있다. -
성찬식으로 나아오기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기 전,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능동적으로 평화를 전한다. 이웃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때만 평화의 왕자인 그분의 식탁에 나아갈 수 있는 실재를 예전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아이는 평화를 전하는 것이 예배에서 핵심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이웃과 화평을 이룸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추구하는 것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실천하게 된다. 우리가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대부분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순간들을 통해 우리의 일상 안으로 들어온다. 작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상호 작용안에서 우리는 일요일에 연습하는 평화의 인사 건네기를 재연한다. 이름 없고 그 자체로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평범한 사랑이 바로 땅 위에 존재하는 평화의 실체이며 일상에서 통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때로 샬롬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큰 이념을 평범한 일상의 기본 요소와 분리시킨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는 우리에게 평화란 집에서 자라나며, 가정과 교회와 동네에서, 일과 속에서, 가장 작은 규모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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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에레미야는 우리가 속한 작은 영역의 평화가 우리의 도시, 국가, 세상이라는 더 넓은 규모의 평화와 뗄 수 없는 관계로 서로 묶여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렘 29:7)
그리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은 우리가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시작된다. 정의를 향한 작은 선택을 하고, 공정 무역 제품을 사고, 쌓아 두는 대신 나누고, 주변 사람들에게 잡지를 베풀고, 의견이 맞지 않는 이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고, "용서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평화의 인사를 건네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물고기와 빵처럼 이러한 일상의 일들을 가져다가 축복하시고 풍성하게 불리신다. -
우리는 둘 다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때로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인내심을 잃으며 평범함 속에서 반짝이는 소망의 순간을 맞이한다. 우리는 둘 다 일상의 삶과 일 가운데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기 위해 노력한다. 가난의 문제는 공동체가 없는 것, 가족이나 친구와의 깊은 연대가 없는 것,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 넘어졌을 때 잡아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법을 배우기를, 세상으로 나아가 주변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피스메이커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부르신 장소와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평화의 인사를 건네는 것'은 '급진적' 실천도 '평범한' 실천도 아닌 기독교적 실천이며, 우리 각자는 매일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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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다툼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칼을 주워 들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우리는 하루 종일 계속 용서해야 할 것이다. 평화는 아주 고단한 일이다. 분쟁과 분냄이 더 쉬워 보인다. 어쨌든 그 길은 더 짧지 않은가. 덜 굴욕적이기도 하고. 우리는 깨어진 세상의 깨어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샬롬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언제나 용서와 화해를 포함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용서를 베푸는 것, 즉 "[그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는 것]"은 보상과 억울함에 대한 그리고 자기 의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용서와 화해는 그리스도께 받은 용서에서 흘러나온다. 결국 하나님이 평화를 일시는 분이다. 우리 힘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셨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신다. 우리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분의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 이것을 믿는 것은 신앙의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