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아빠
우이독경(나의 서툰 스피치 이야기)_김미경의 아트 스피치(김미경/21세기북스)를 읽고 본문
우이독경 (나의 서툰 스피치 이야기)
우이 독경. 우리는 듣는 사람이 말귀를 잘 못 알아 들을 때 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반대다. 소한테 경을 읽어주어봤자다.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왜 경을 읽어주냐는 거다. 소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쇠귀에 경을 읽은 사람이 잘못한거다.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화자보다 청자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는 귀가 먹어서인지 대화를 하다가 상대방의 말을 못 들을 때가 있다. 세번까지는 다시 말해달라고 하지만, 그래도 듣지 못했을 때에는 그냥 알아들은 척, ‘응, 그래’ 하고 얼버무리며 넘어간다. 더 물어보면 내가 무례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말하는 사람이 상대방이 잘 알아듣게 말해야한다라는 말을 나한테는 적용할 수 있지만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아직도 대세는 청자보다는 화자다. 그래서인지 스피치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안한다. 듣는 사람이 잘 들어야 한다고만 생각을 한다.
나는 매주 중고등학생에게 설교를 한다. 한번씩 대학생들에게 하는 강의는 할 만한데, 중고등학생은 매주하는데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설교와 설교자’를 읽으면서 설교의 중요성과 설교자의 자세는 알겠다. 그런데 설교를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어렵다. 교사들은 진지하게 듣고 반응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질문을 하지만 보통 선생님들이 대답한다. 간간히 기분 좋은 녀석이 대답을 해 줄 때도 있다. 자기 이름이 호명되면 마지못해 대답 해준다. 아니질문이 뭐였는지 다시 물어본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만 아이들의 복음은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다. 이때가 가장 밝다.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정답은 커녕 가이드라인조차도 없다.
그런 내게 이 책은 복음처럼 다가왔다. 내가 좌충우돌하며 간신히 익힌 스피치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길에서 만난 어른에게 인사도 못할 정도로 소심했다고 한다. 나는 기억나지 않기에 신뢰할 수 없지만 어머니의 말이 그렇다. 그래서 웅변학원에 보내졌다. 반년 다니고 전국웅변대회에 나갔다. 삼천포에서 마산까지 갔다. 강단에 섰다. 그리고 내려왔다. 중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없다. 술 먹고 필름이 끊기면 이럴까. 내가 강단에 선 부분은 편집되었다. 그냥 짤린 거다. 끝내고 내려가는 나를 심사위원들이 부른다. “차렷 해보세요”. 똑바로 섰다. 제대로 설 수 있는데 아까는 왜 그렇게 섰냐고 말한다. 강단에서 말할 때는 팔이 뒤로 젖혀져 있었단다. 최우수상을 받았다. 기쁨 보다는 내가 무얼하고 이상을 받았는지 얼떨떨했다.
그 때를 시작으로 학창시절에 강단에 설 기회가 있었다. 그건 다 실패의 경험이다. 학교대표로 웅변대회에 나가서 중간에 원고를 까먹은 적이 있다. 남이 써준 원고를 외워서 말한다는게 쉽지 않은 것이다.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으로 시작해서 ‘핵 확산 금지조약 탈퇴’ 등 어려운 말이 너무 많았다. 긴장한 탓에 머리가 하얘졌었다. 대학생 때 첫 설교를 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리더훈련이 끝날 때 디렉터가 폐회예배 설교를 하던 전통이 있었다. 밤새 설교를 준비해서 앞에 섰다. 선후배 앞에 서는 것과 설교라는 부담감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를 보고 있는 100 여개의 눈. 긴장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탄력을 받아 신나게 설교를 했다. 그러다가 한순간, 내가 여태 무슨 얘길 했는지 무얼 말해야 하는지 머리가 깨끗해졌다. 30초의 정적. 서 있는 사람도 앉아 있는 사람도 어색한 1시간 같은 30초였다. 그 이후로 강의를 가면 꼭 챙기는 것이 있다. 바로, 물! 물 한모금이 시간도 벌고 마음도 추스릴 수 있어서 나에게는 필수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스피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듬어 가고 있다. 얼마전, 10분의 스피치를 위해 아내를 앉혀 놓고 연습했다. 아내가 자세를 지적했다. 발을 앞뒤로 벌리고 상체를 앞뒤로 흔드는 것이 산만해서 집중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다음부터는 자세를 의식하며 앞에 섰다. 그렇게 자세를 고쳤다. 요즘 새로운 지적을 받았다. 강의와 설교중에 ‘괘서’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괘서가 무슨 말이야? 왜써?” 아내가 물었다. 나는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의식하며 말했다. 앞에서 말할 때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종종 나오는 습관어가 되어 있었다. 흐름을 곰곰히 따져보니 ‘그래서’를 빨리 말하다 보니 ‘괘서’가 된 것이었다. 그건 아직 바꾸는 중이다.
이런 경험과 아내의 조언 그리고 어떻게 해야 잘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준비하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고 해도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알아야 고친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잘하고, 잘 못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청자의 반응으로 알 수 있는데, 이건 날마다 다르다. 그런 내가 ‘아트 스피치’를 보면서 시야가 확 넓어진 느낌이다. 좋은 스피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무작정 길을 찾아 가고 있는 나에게 지도가 딱 나타난 느낌이다. 나만의 콘텐츠를 담아서 청중과 소통을 한다. 청중과 잘 소통하기 위해 노래하듯이, 지휘하듯이 말한다. 밋밋한 일차원 적 말하기가 입체적 스피치로 변화되는 것이다. 스피치는 청중과의 소통이다. 청중과의 소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찾은 것이다. 그 길에 어떤 난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리로 향하면 된다. 말하기라는 미로에서 해매고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지난 해 베스트셀러 상위 20권 중 9권이 자기계발서였다. 자기계발서는 보통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이야기한다. 내 생각에 그리스도인의 자기계발서는 제자도이다. 제자도가 결국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말이다. 그런데 자기계발서에는 삶의 스킬을 다루는 책도 있었다. 자기의 스킬을 나누는 것이다. 바로 ‘아트 스피치’가 그런 책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것을 익혀서 나도 예술적 말하기를 해봐야겠다. 소 귀에 경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소를 구도자, 행동가로 만들고 그들과 소통하는 스피커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