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아빠
내 인생의 한 구절 : 말씀이 삶이 되다 (김기석 서문 외 17명 / 잉클링즈) 본문
내 인생의 한구절 : 말씀이 삶이 되다
(김기석 서문 외 17명 / 잉클링즈)
토요일 저녁, 아내와 아이들을 재우고, 책상에 앉는다. 앗, 어느새 일요일이다. 벌써 새로운 날이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매일 시간이 부족하다. 그리고 항상 피곤하다. 아이는 쑥쑥 자라는데, 나는 푹푹 늙어간다. 토요일 저녁 정도는 되어야 나만의 시간을 가진다. 신혼때도 꼭 가졌던 개인 시간이 어린 상전과 함께 사라졌다. 그것도 코로나 시국이어서 어디 나가지 못해서 가지는 여유다. 그 전엔 주말마다 나들이 간다고 저녁엔 바로 취침이었다.
마음 속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다. 매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동경하지만,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가족을 돌본다는 핑계로 하나님에게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라고 사정할 뿐이다.
정신없는 삶에 책이 한권 찾아왔다. 내 인생의 한구절! 이 책은 부제가 더 눈길을 끌었다. 말씀이 삶이 되다. 가만 돌아보니 삶이 될 말씀이 나에게 없다. 그래서 책과 함께 성경도 책상위에 놓인다. 오랜만에 꺼낸 성경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 너무 니 맘대로 살았어!” 회개하는 마음으로 책도 같이 읽는다. 말씀이 내 삶이 되기를 기도하며! 내 인생에도 한구절 말씀을 주시길 기도하며.
<하나님의 러브레터>에서 ‘창세기는 어떻게 인간이 한결같이 실패했고 하나님은 성공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라고 말한다. 내 인생의 한구절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사람 한사람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 보게 된다. 본이 되는 신앙의 선배들을 찾기가 힘들다고 넋두리하는 요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다. 그런 사람을 찾기만 하고, 내가 본이 되어보자까지는 아직 머나먼 여정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치장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치부와 고통을 솔직 담백하게 나누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공스토리를 본다. 그리고 그 성공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책을 빠르게 한번 읽었다. 한 분, 한 분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천천히 다시 되짚어 읽어본다. 그 삶에 잠시나마 함께 하며, 번뇌와 아픔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조금이나마 들어보고자 했다. 성경의 한구절 한구절들이 마음 깊이 새겨진다. 말씀이 내 삶에도 새겨진다.
장석윤 목사님의 “극적인 사건들을 접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잘 이겨 낼 것 같았지만, 문제는 전혀 진전이 없는 매일을 살아 내는 일이었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아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지만, 막상 여전히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기에. 그런 하루를 견디어 낸다. 혼자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한다.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따라 그 인생은 결정되기 마련이다’라고 김유준 목사님은 말한다. 내 삶은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서로 다른 삶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삶이 하나님 한분으로 꿰어진다. 그래서 큰 울림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성경구절 하나하나가 내 삶 깊이 다가온다.
나도 나이가 더 들면 다른 누군가에게, 아니 자녀에게 나의 삶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내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뿐이었다고. 내가 말하기 전에 사람들이 먼저 그런 고백을 하기를 기도해본다.
차 례
1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_ 우주현
기가 막힐 수렁에서도, 저항의 광장에서도 _ 장석윤
검붉은 상처에 은혜가 돋아나다 _ 김종원
더 기쁜 자랑 _ 김종호
감당할 시험밖에는 없나니 _ 최헌영
2부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_ 김기현
4원 _ 김영준
예수, 희년, 하나님 나라 _ 장승익
홀로 뭍에 계시다가 _ 김유준
사람을 ‘하나님 형상’ 답게 _ 최영규
젖뗀 아이와 같이 되기까지 _ 김영봉
3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청소년부 교사는 어쩌다 어수룩한 목사가 되었나 _ 이승한
상처 입은 치유자로 다시 일어서기까지 _ 이진혜
코로나와 함께 시작한 개척교회 _ 손주환
평온함으로 기뻐하는 중에 _ 이수연
세우시는 창조주의 말씀 _ 정갑신
그 돈, 네 돈 아니다 _ 김병년
책에서 적은 글들
1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우주현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에스겔 16:6)
에스겔 16장 6절 말씀이다.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향해 하시는 이 말씀이 내겐 가슴에 새겨진, 피 맺힌 한 구절이다. 문맥을 살피고 본래의 의미를 따지고 할 것 없이 그냥 내 생의 말씀이 되었다.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본회퍼는 “신도들의 사귐은 꿈같은 우리의 희망적 생각에서가 아니라 아주 실망한 그 자리에서부터”라고 말한 바 있다. 꿈이 다 깨어진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신도들의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이상을 추구하는 공동체는 사실 그 이상이라는 것이 끝이 없었고, 저마다 가지고 온 꿈이 너무나 컸다. …
돌이켜 보면 총신대에 입학하여 신학이라는 길로 들어선 그 순간부터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다. 이미 언급한 대로 매일매일 살아 내는 일들로 너무 버겁고 무거웠다. 학교생활도, 교회생활도, 생계를 유지하는 일도 모두 엄중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암에 뇌경색까지….
그렇게 기어이 하루하루를 살아오면서 이제야 깨닫는 바가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복음이야말로 ‘실패자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언제나 약함의 자리를 준비해 두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후서 12:9)
나는 이제 이 말씀을 믿는다. 약함의 능력을 이제는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살아 있으라’ 말씀하신 이유도,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서 바로 약함의 능력을 깨달으라고 하심인 줄 이제 나는 안다.
기가 막힐 수렁에서도, 저항의 광장에서도
장석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편 40:1~2)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일성이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한 평강의 선포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성경을 읽으며 알았다. 성경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
극적인 사건들을 접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잘 이겨 낼 것 같았지만, 문제는 전혀 진전이 없는 매일을 살아 내는 일이었다. 이렇게 일상의 두려움과 싸우는 일은, 크고 작은 기적을 경험한 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매일 싸워야 했으니까.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편 92:1)
자다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평안히 잔다는 것, 아침마다 새날을 주심을 찬양한다는 것은 이제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라는 특별한 은혜였다.
말씀이 나를 일으키고 세우심이 분명하다. 아울러 주께서는 그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사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셨다. 그렇다. 나에게 말씀은 그 말씀대로 사는 삶과 사람을 통해 능력이 되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하나님은, 더 정성을 들여 예배하는 것이 온전한 예배라 착각한 이스라엘을 향해 제사보다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과 선택은 늘상 더 큰 정성, 더 많은 헌신, 더 큰 것, 더 센 것을 사모하는 방식으로 옮겨 간다.
검붉은 상처에 은혜가 돋아나다
김종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 62:5)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 실패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 기도도 힘을 잃어 갔다. 기도로 시작한 나의 신학은 졸지에 기도를 잃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9~10)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가 맞는 아침은 생명의 환희이다. 고통이라는 단어조차도 사치스러울 만큼 밤새도록 죽음의 숫자를 헤아렸을 것이다. ‘바다의 끝, 새벽 날개’는 그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 절망의 끝에서 주님을 만나 일어선다. “안다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그것이 아픔을 동반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라 했다. 나는 안다. 그걸알게 되기 위해 상처받았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 62:5)
나는 기도하는 법을 잊어 간다. 내가 잘하는 것이라고 훈장같이 여기던 기도의 법을 잊은 지 오래다. 그래서 고백한다. ‘생존을 위한 기도’가 떠나간 검붉고 딱딱한 상처에 ‘은혜’가 돋아났다. 잠이 없는 자리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습관이 자리를 잡았다.
더 기쁜 자랑
김종호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2:9, 새번역)
장애를 가지면서 처음 마주하는 현실은 자의식이나 열등감 이전에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는 기구함이다. 존재 자체가 근심거리가 되어 의도치 않은 불효자가 된다.
나도 병신, 쪽쪽발, 절뚝발이 등 다양한 차별과 조롱의 언어를 들으며 자랐고, 체육시간이면 열외가 되어 남들 하는 걸 멀뚱멀뚱 구경만 하는 존재로 ‘배려라는 이름의 소외’를 경험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존감을 형성하는 과정은 평탄치 않다. 나를 감추고 포장하는 법을 더 많이 익혔고, 장애가 대표적인 평가 요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내 존재에 대한 고민은 진로선택, 결혼, 대인관계 등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비록 기적 같은 경험으로 나를 고쳐 주시진 않았지만, 돌아보면 하나님은 장애와 더불어 사는 법, 장애에 매이지 않고 사는 법을 알려 주셨다. 부분적으로는 장애가 개선되는 일도 있었다. 내가 생각한 방식은 아니었으나 이 또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는 왼쪽 귀가 안 들리고, 오른쪽 눈이 안 보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면역 억제제를 비롯해 수십 알의 약을 먹어야 겨우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보실 수 있죠? 들으실 수 있죠? 걸으실 수 있죠? 사실 이 모든 게 기적입니다.”
마르바는 일상에서 당연히 여기던 것들이 기적임을 알게 해주신 분이셨다. 그러면서 평생 약함을 친구 삼아 살아 오면서 배운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아주 작은 것에도 기뻐하며 일상과 오늘을 감사하는 영혼의 부요함을 간증하셨다.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도 불행한 사람들 앞에서, 많은 것을 상실했고 약함으로 평생 고통당하면서도 기뻐하는 삶을 살고 계신 마르바의 모습은 큰 외침과 울림이 되었다.
장애를 기뻐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고통을 기뻐하는 것은 고통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 얻게 된 새로운 은혜를 기뻐한다는 뜻이다. 고통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고 행복하고 자긍심이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내게 자전거 같은 분이시다.
내가 어떤 목적지에 이르도록 도와주지만, 차와 달리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교통수단이 자전거이다. 하나님은 내가 넋 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폐달을 밟길 원하시고 사방을 살피며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나아가길 원하신다. 인생은 하나님이라는 자전거에 올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때로 오르막을 오를 때는 내던져 버리고 싶은 게 자전거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회의가 밀려 온다. 때려치우고 싶은 인생처럼 느껴질 고된 순간, 지겨운 오르막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러나 참아 내고 어느덧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감개무량해진다. 잠시 후 내리막을 내달릴 때는 천하를 얻은 것 같은 상쾌함을 만끽하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라고 해서 오르막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고단함을 다 겪지만, 그 끝에 말할 수 없는 보람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자전거를 탈 때 자유를 느낀다. 내 다리의 장애를 가장 덜 느끼는 순간이다. 나는 뛸 때 장애를 가장 선명하게 느끼고, 걸을 때도 조금 느낀다. 그러나 자전거를 탈 때는 잊게 된다. 꽉 막힌 차들 사이로 시원하게 내달릴 때 느끼는 상쾌함과 자유는 경험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느끼는 자유가 바로 이런 느낌이다. 나로 사슴과 같이 달리게 하신다. 자전거 같은 하나님. 바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감당할 시험밖에는 없나니
최헌영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지금까지 하나님은 은밀하게 그리고 세밀하게 우리 가정 안에서 일하고 계셨다. 예진이의 작은 신음에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예진이가 태어나고 2년여 아픔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주변의 많은 분께 기도의 빚을 졌다. 자기 일처럼 같이 아파해 주고, 함께 기도의 손을 모아 주셨다.
20년 전 혈관종양의 아픔을 겪는 중에도 하나님은 세밀하게 간섭하셨다. 이제 예진이의 갑상선암 치료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동일하게 간섭하고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이 있음을 믿는다.
2부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김기현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1)
전에는 너무 힘들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흘렀다면, 여전히 그 정서도 살아 있지만, 이제는 감사해서, 좋아서, 미칠 정도로 행복해서 운다.
고난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 버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난을 이기려고 하면, 내가 부서진다. 백전백패다. … 이 악물고 견디다 보니 어느 날, 그 일이, 그날 일이 옛날이 되어 있는 거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고, 뛰어난 생각과 삶을 살았던 이들의 글이 나를 단단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책을 쓰게 되었고, 인생을 다시 쓰게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것이 마가복음이 말하는 복음의 요체인 거다. 마가복음은 말한다. 너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그래서 나도 주님께 고백했다.
우리가 만약 아바의 자녀라는 분명한 자아상을 확립하고 있다면, 그분 앞에서 자신이 한 일을 말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할 것이다 .”아버지, 저예요, 저!”
그러고 보니 내 안에는 두 개의 말이 항시 싸우고 있었다. ‘사람의 말’ 대 ‘하늘의 소리’! 나는 버텼고, 말씀이 이겼다. 단번에, 한 번에 승리한 것은 분명 아니다. 나는 날마다 피 흘렸고, 패배하기 일쑤였다. 점차 말씀이 움직였고, 내 삶 속에서 작동했다. 그리고 사람의 말들을 내 안에서 밀어냈다. 그 말씀이 나를 장악했고, 지배했다. 그렇다. 하늘의 소리가 이겼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살았다.
사랑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의 전진은 자신 없어도, 기쁨을 받는 자에서 기쁘게 하는 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 말이다.
4원
김영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1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9~13)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기도하며 구하고 찾아야 할 것을 ‘성령’이라고 특정해 말씀하셨다.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찾고, ‘성령’을 만나기 위해 문을 두드리라는 것이 예수의 말씀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예수라면 그렇게 기도했겠다 싶었다. 돈이 없어도 가오 있는 목사라면 돈이 아니라 성령을 청해야 하겠기에, 예수의 말씀 따라 ‘성령’을 주시라 기도했다.
예수께서 기도할 때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건 맛있는 고기로 신선하게 진공포장되지 말라는 뜻이겠다. ‘숨결’이나 ‘생기’에 노출되어야 살 수 있는 산 오리로 진흙 도랑을 헤엄치며, 뒤뚱뒤뚱 걸으며 살아 있으라는 뜻이겠다.
예수, 희년, 하나님 나라
장승익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18~19)
나는 목회란 오직 예수가 하셨던 바로 그 일을 이어 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신학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신학 역시 예수의 말씀과 삶을 논리적으로 이 세상에 바르게 전하고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다. 희년의 근본 취지는 자유와 해방이요,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공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여 은혜받은 우리는 이 받은바 은혜를 널리 전하고 퍼뜨려야 할 것이다.
탁월한 구약학자였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예언자들>에서 예언이란 “인간 상황을 하늘의 눈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늘의 눈으로 인간 실존을 주석하는 것”이라 했다. 구약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었다.
홀로 뭍에 계시다가
김유준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저물매 배는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마가복음 6:45~47)
사실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따라 그 인생은 결정되기 마련이다. 외롭고 힘든 자신의 인생을 채우는 그 무엇 또는 대상이 있다면 그 선택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결정하게 된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고독과 침묵은 듣는 침묵이요, 겸손한 침묵이다. 그것을 말씀에 매인 침묵이다. 고요함 중에 깨닫는 힘, 영혼을 맑게 하는 힘, 본질에 집중하는 힘을 얻는다.
“오직 하나님께만 즐거움을 두어야 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인생의 빈 영혼을 채울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만이 날마다 더욱더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헤어지기 싫고, 계속 함께 있고 싶은 마음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사랑하는 그분을 날마다 새롭게 알아가며 그분의 뜻을 따라 공평과 정의의 삶을 이 땅에 세워가는 것이 평생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하나님 형상’답게
최영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창세기 1:27)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시 무엇이라 쉽게 말하기 힘드나, 사람은 눈에 보이니 할 말이 많다. ‘사람’은 내게 오랜 묵상거리이고, 고민거리이면서, 사랑의 대상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일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 제일주의’에 빠져서 사람은 늘 뒷전에 두고 말았다.
비단 제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너’와 ‘나’를 구분하기에 급급했다. 피부색이 달라서, 언어가 달라서, 출신지가 달라서, 그리고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 달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형상’ 된 인간을 이렇게 구분하고 저렇게 재단할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면 속이 편할 것 같다.
그분(하나님)에게 인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했으면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신이 친히 사람이 되었겠는가?
젖뗀 아이와 같이 되기까지
김영봉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시편 131:1~3, 새번역)
내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큰 축복이다. 만일 이 영적 상황을 직시하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면, 지금껏 위선과 허위의 가면을 쓰고 살았을 것이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시편 131:1, 새번역)
시편에서 ‘교만’은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안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시편 131:2, 새번역)
다윗은 오랜 세월 동안의 영적 생활 끝에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자신이 오래도록 갈망해 오던 것을 찾았다. 그것을 찾고 나니 그를 괴롭히고 분심하게 했던 욕망들이 고개 숙이는 것을 경험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시편 131:3, 새번역)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을 위해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돌아갈 때에야 비로소 안식을 얻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시편 131편을 요약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진정한 만족과 안식을 발견했기에 이렇게 썼고, 이 문장이 <고백록>의 가장 유명한 구절로 회자되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향방 없이 다니며 나를 소모했지만, 이제는 나 자신의 영성을 지키는 일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구하는 기도를 줄이고 깊은 사귐을 추구하는 일에 시간을 쏟았다.
3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청소년부 교사는 어쩌다 어수룩한 목사가 되었나
이승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상처 입은 치유자로 다시 일어서기까지
이진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마가복음 1:11)
그러던 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어디든 찾아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기쁨이고,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 한 말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마가복음 1:11)
이 짧은 구절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기도원에서 경험한 그 기쁨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분은 분명 나를 기뻐하신다고 하셨건만, 당시의 나는 하나님이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하나님은 그냥 하늘의 경찰관 같았다.
‘내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죽어 갈 때, 열한 제자들은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한 여인들은 무덤까지 함께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하는 일에 부름 받은 건 그녀들이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이….’
그 순간,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기쁨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었다. 주님은 연약한 자들, 그러면서 주님의 고난에 끝까지 함께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내 신앙생활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절망과 상실, 고통과 실패 가운데서 내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무가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분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육체의 것으로 기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게 도와주소서.’
코로나와 함께 시작한 개척 교회
손주환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
(시편 37:23~24, 새번역)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면 지켜 주실 것이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손잡아 주시리라 믿고, 이름값 하기 위해 뚜벅뚜벅 오늘도 걸어간다.
평온함으로 기뻐하는 중에
이수연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107:30, 개역한글)
시편 107편 30절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목표가 없어도 괜찮아. 너보다 너를 더 잘 아는 내가 인도할 테니, 너는 나를 온전히 신뢰하고 여기 머물면서 평온해하고 기뻐하렴. 목적지에는 내가 데려가마.
도무지 앞길을 알 수 없는 때가 있다. 이렇게 해야 할지 저렇게 해야 할지 답을 알지 못할 때다. 그때마다 이 구절은 내가 힘을 풀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도록, 나를 주님께 내어 맡기도록 해준다.
세우시는 창조주의 말씀
정갑신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6:26)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건지, 하나님의 필요에 답하려는 건지 깊이 물어보세요.”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상활을 반추할 겨를 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말씀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가짜’였음을 고발했다. 내가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부터였고, 분노로 잠을 못 이룬 것은 나를 분노케 한 자들의 무례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진정한 문제가 그들의 무례함이 아니라, 그것을 헤아리거나 견뎌낼 수 없었던 나의 ‘자기 존재 증명 욕구’였다는 걸 선명하게 알려 주었다.
자신의 초라한 실체를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누리는 자유의 맛을 조금씩 알아 가기 시작했다. 아울러 내가 아무리 확연한 변화를 이룬다 해도, 이후에 다가오는 시간들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자가 못된다는 사실도 실감 나게 깨달았다.
그 돈, 네 돈 아니다
김병년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마가복음 6:37)
어느 날 김동호 목사님이 ‘오병이어’를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도전하셨다.
오천 명분을 깔고 앉아서 자기 혼자 다 먹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오천 명을 먹이는 한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설교자가 기록된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청중들은 선포되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할 때 설교자의 권위가 반듯하게 선다. 설교의 권위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권위가 살아 있는 말씀이 성도들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은 오병이어 설교로 성도들에게는 헌신을 말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헌신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게 하셨다. 받는 것은 기뻐하면서 즐거이 드리지는 않는 내 모습을,
그렇게 ‘나는 가진 것이 없다’고 강하게 확신했다. 그런데도 너희가 주라는 울림이 계속되었다. 반발하는 마음을 접고 말씀을 찬찬히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음이 왔다.
‘너희가 주라는 거구나! 나 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었구나.’
나 혼자의 헌신이 아니라 함께하는 우리 모두의 헌신과 사랑을 통하여 그 약속을 이루신다는 표식 같았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많이 주시든 적게 주시든, 비를 내리시든 태양을 비추시든,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우리가 말씀 아래에서 새로운 공동체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늘 주기도문으로 공동기도를 드린다. 그 기도에서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이 기도는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소유를 최소화하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것을 드리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성령님은 강력하게 요청하신다. 성령님은 다른 어떤 기적보다 ‘나의 것을 희생하여 다른 이들을 섬기는’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다. 자기를 숨기시는 성령의 본성에 ‘희생’은 가장 잘 어울린다. 성령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도록 하신다. 굶주리는 사람들을 보면 음식을 나누라고 하신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떡을 먹어야 사는 존재임을 하나님은 분명히 하셨다. 그런 하나님이 목회자를 떡과 말씀을 먹이는 자로 부르시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아내를 돌보고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나에게 먹을 것을 주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감사할 뿐이다. 변변치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내가 먹인 이웃을 또 얼마나 많은지 그것도 감사할 뿐이다. 평소 무엇이든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픈 나에게 탐욕을 내려놓도록 ‘네 것 아니다’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7)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처럼 목회를 하고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나의 인격과 삶을 담기보다 자꾸 가르치려고만 한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쁜 길에서 내 발길을 돌렸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나는 주님의 규례들에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도 단지요?
내 입에는 꿀보다 더 답니다.
주님의 법도로 내가 슬기로워지니,
거짓된 길은 어떤 길이든지 미워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시편 119:101~105,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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